혼잣말

앵두

치악동인 2016. 4. 5. 10:47

앵두의 혀

 

안도현

앵두를 먹었지

그러니까 작년 여름

툇마루 끝에 앉아 먹었지

한 알 한 알이 예뻐서

한 알 한 알을 낱낱이 들여다보며

거 왜 있잖아, 시기도 하고 달기도 한

연애 같은 앵두를

흰 쟁반 가득 따다가 놓고서는

손가락으로 한 알 한 알 골라 먹었지

앵두 즙이 잇몸 속까지 적셔서 처음에는 찔끔 진저리치기도 했지만

그러다가, 언제 이 앵두를 다 먹나 싶어서

한 움큼씩 입에 털어 넣듯이도 먹었지

아무리 입에 우겨 넣어도 볼이 불룩해지지 않는 것은

앵두 알을 씹는 사이, 그 어느 틈에

씨앗을 발라 뱉는 기막힌 혀가 있기 때문

거 왜 있잖아, 앵두의 입술에 내 입술이 닿을 때,

앵두 알을 깨물어 입안에서 환하게 토도독 터져서는 물기 번질 때,

하루 내내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때,

장차 내 인생이나 네 인생에 쉽사리 잘 오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때,

앵두를 먹을 때,

툇마루 끝에 앉아

앵두를 먹었지

앵두 씨를 툿,툿,툿, 뱉어가며 먹었지

그런데 있잖아, 앵두 씨에도 혀가 있다는 말 들어봤나?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혀끝으로 발라 우리가 마당에다 내뱉은 만큼

앵두 씨가 자기를 밀어 올리는 것 봤나?

지금 앵두의 혀가

날름날름 연초록 바람을 골라 먹고 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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