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잣말

네가 그리우면

치악동인 2016. 4. 7. 10:41

네가 그리우면 나는 웃었다

강재남

목련이 피었다 지는 걸 보고 4월이구나 누군가 그 아래서 베르테르 편지를 읽겠구나 생각하였소

좀 더 아래로 나의 소녀가 지나는 것이 보였지만 소녀는 깔깔거리지 않았소

베르테르는 늙어버렸고 목련은 재미없이 떨어지기만 하였소 너무 큰 꽃송이는 쉽게 눈에 띄지만 누군가의 눈에 담기기엔 얼마나 큰 눈을 가져야만 할까 생각하였소

햇살이 창가로 떨어지고 있었소 창문을 열어 공중의 햇살들을 불러 모았소

네가 들어와 앉기엔 창틀이 낡았구나 창틀에 동그랗게 햇살방석을 만들었소

네가 없는 세상이 퍽이나 재미가 있어서 나는 매일을 깔깔대며 살았소

그러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유치원생 글자처럼 삐뚤삐뚤 걷기도 하였소

네가 없는 세상이 퍽이나 재미가 있어서 벚나무에서는 꽃잎이 눈물로 흩날리고 진달래가 예고 없이 붉기만 하였소

그럴 때는 내 심장에서도 붉은 꽃이 피었소 목련은 가지마다 모가지를 늘이고 꽃상여에 올랐소

중천으로 가면 네가 없는 세상이 퍽이나 재미가 있었다 말해줄 모양이오

네가 없는 세상이 퍽이나 재미가 있어서 나무에 뺨을 대보기도 하오

그곳에서 네 심장소리 들리는 듯하여 다시 뺨을 대었소

나뭇잎 수런거리는 소리만 들리오

나무는 참으로 변덕쟁이란 걸 진즉에 알았었소

길을 걷다가 네 닮은 사람을 보았소

네가 없는 세상이 퍽이나 재미가 있어서 무심히 지나쳤소

늙은 베르테르가 노래도 없는 4월을 건너고 있었소

―『문학·선』(2012.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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