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기사가 전화가 왔다.
박스하나 공장문앞에 두고 간다고.
어제 공구주문한건 아침에 받았는데 무슨 택배?
고등학교 동창이랑 점심을 먹느라 공장을 비웠다.
공고를 졸업했는데 녀석은 호텔리어가 됐다.
나처럼 말라서 비실비실 대던 녀석이 살이 너무 쪄서 다이어트중이란다.
물론 나도 고교시절의 말라깽이는 아니다.
어떤 친구는 기관사를 하고 어떤 친구는 안경점사장이다.
또 어떤 친구는 가업을 이어받아 신문사 사장이다.
그래도 이런 친구들은 자리를 잘 잡고 사는것일테지.
연락이 잘 닿지않는 동창들은 지지리 궁상으로 살고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공고에 진학할때만 해도 우린 기술한국을 이끌어나갈
산업화의 기수라고 추켜세웠다.
어깨에 그런 의미의 견장도 달렸다.
전국에 약 스무개정도의 공고가 그런 견장을 달았다.
상위 십퍼센트의 성적정도는 돼야 원서를 써 줬다.
나름 공부를 꽤 했다는 놈들은 3년후 공돌이가 됐다.
게중 눈을 일찍 뜬 놈들은 진학반을 갔지만 나랑 함께 자취하던 정근이는 진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연락이 닿지 않는
친구에 속한다.
어찌 어찌 소문으로는 이일 저일 전전한다고.
사는게 목표한데로 되던가.
내 어린시절꿈은 연구자였다.
초등학교때 선생님이 지어준 "자연박사"라는 별명때문에
그렇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난 공부를 파고드는 성격도 아니고 우리집도 공부를 채근할 환경은 아니었다.
우리 아버지는 수시로 코피를 쏟으셨는데 어린시절 코피는 피곤하면 나는건줄 알았다.
가정을 잘 못 지키셨으나 코피흘리는 아버지께 도움이 되고 싶어 중학교부터 들어가면서 공고를 갈거라고 아예 정했다.
공고를 갈건데 공부를 팔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처럼 학원을 따로 다니는 시절이 아니니 수업시간에 집중만 하면 상위권성적을 유지하는건 노력안해도 충분했다.
호텔리어가 된 친구도 공돌이로 시작했으나 공장의 십여년 선배들 모습에서 아니다 싶은 생각에 일찍 사직서를 냈딘다.
난 밤낯없이 일만 해서 남들이 어찌 사는지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다.
한발짝 물러서서 볼 수 없었다.
한발짝 물러나서 보고 궤도를 수정한 녀석이 잘 한건지
내가 잘 한건지 그건 모른다.
나도 나름 잘 살았지 않은가.
공장앞에 덩그러니 놓여진 택배상자가 궁금했다.
도라지배즙이다.
딸아인가?
그럼 집주소로 보내지 왜 공장으로 보냈을까.
셋째누나인가?
한달내내 감기로 고생했다니 누나가 보냈을수도 있다.
그런데 누나도 집으로 보내지 왜 공장으로 보낼까.
너인가?
발송업체로 전화를 했다.
딸 아이다.
왜 공장으로 보내서 애비를 설레게 하나,,,
왜 난 아직도 이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