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잣말

강냉이 범벅

치악동인 2011. 3. 9. 14:18

 

삼일절날은 날씨가 종일 궂었다.

오전에 눈비가 번갈아 내리더니 오후들어 조금 밝아지는듯도 했으나

우중충하게 하루가 저물어갔다.

답답한 맘에 높은 산에 쌓인 눈구경이라도 하려고 나가봤으나 내 눈에 보이는 풍경을

사진에 제대로 옮겨담을순 없었다.

저녁밥이라도 준비하려고 쌀을 퍼담았다.

쌀 세공기.

현미 한공기.

검은 콩 한줌.

그리고 지난번 정선에서 사 온 말린 찰 옥수수 몇알갱이를 넣으려 했다.

 

그런데 옥수수에 문제가 생겼다.

아내가 플라스틱 통에 담아뒀는데 그 통 안에 습기가 남아있었는지 옥수수 알갱이에 하얗게

곰팡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선 물에 담근 쌀부터 해결해야하니 잡곡 네공기를 밥솥에 넣고 취사버튼을 눌렀다.

이제 이 옥수수를 어찌 해야한다?

사다놓고 겨우 한두번 밥 할때 몇알씩 넣어본게 다 인데 몽땅 버리게 생겼잖나.

하지만 난 그런걸 쉽게 버리라고 배우지 않았다.

울 할아버지는 구한말에 독선생에게 십여년 넘게 교육을 받으신분이셨다.

그 교육이 현대식 교육이었으면 삶에 보탬이 되었겠지만 아쉽게도 구식교육이었다.

할아버지가 많이 배우셨다는걸 확인한건 집안 족보편찬때였는데

족보의 수많은 글씨를 일일이 붓글씨로 쓰셨다.

그런 할아버지께서 우리 손주들에게 늘 말씀하신건 "검소한 삶"이었다.

특히 음식을 남겨 버리는 부분에 대해선 무척 엄격하셔서 밥상앞에서 자주 할아버지의

긴 잔소리를 들어야했다.

그 잔소리가 길어지신 어느날 우리 누나가 할아버지께 불만을 터뜨렸다.

누나는 하마터면 할아버지의 장죽에 머리통에 구멍이 날 뻔했다.

할아버지의 반복교육 덕분인지 나도 음식을 버리는것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다.

딸아이가 어렸을적 밥그릇에 덕지덕지 밥풀을 묻힌채 먹는다고 줘 팬적도 있다.

사실 난 때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이젠 다 커버린 딸아이가 그날을 기억하고 있어서

어찌 그런일로 딸을 때릴수가 있냐고 원망할때 아주 민망했다.

내가 정말 그랬냐?

아마 맞을거다.우리 마누라도 내게 잔소리 엄청 들었으니까.

음식을 먹을땐 이 음식이 내 앞에 올때까지 수고한 사람들을 생각해야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은 내 머릿속에 콱 박혀있는 기둥같은것이었다.

그런 내가  하얀 곰팡이가 막 시작되는 옥수수알갱이를 어찌 버릴수 있나.

일단 인터넷을 뒤졌다.

옥수수로 할수있는 요리,,,

그라탕,,,뭐,,,뭐,,,

내가 찾는건 옥수수와 팥을 넣고 달콤하게 끓여내는 그런거였다.

찾았다.

그 이름이 "옥수수 범벅"이란다.

옥수수 범벅이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강냉이 범벅이 훨씬 낫지.

만들기도 엄청 쉬워보였다.

강냉이를 먼저 끓이다가 팥과 강낭콩을 넣고 더 끓이고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하면 된단다.

내가 찾는게 맞다.

어릴적 시골사는 친구들이 가끔 이 강냉이 범벅을 도시락으로 싸 오곤 했는데

아주 맛있어서 내 쌀밥과 바꿔먹곤 했었다.

그때까지만해도 우리집은 그냥 저냥 먹고 살만한 집이었다.

내 기억이 미치지 못하는 더 어렸을땐 꽤나 부유했다지만 이미 내리막은 시작되었던 모양이었다.

중학교 들어가기전에 우리집의 모든 재산은 공중부양과 동시에 산산히 분해되었다.

 

우선 강냉이를 깨끗한 물이 나올때까지 몇번이고 비벼 씻었다.

그리고 제법 큰 냄비에 담으니 삼분지일쯤  찼다.

물을 넉넉히 받아서 불을 켜고 두 공기쯤 남아있는 팥을 씻어 건졌다.

강낭콩을 넣으라는데 마트에 가기도 귀찮고 이 겨울에 강낭콩이 있을지도 의문이라서

강낭콩 대신 검정콩을 넣어보기로 했다.

아무렴 어떤가. 콩은 콩인데,,,

대충 옥수수가 끓기 시작했다.

그냥 끓이기만 하면 될줄알았는데 밑바다에 눌어붙을수 있으니 주걱으로 저어줘야했다.

소금 적당량을 넣었다.

설탕통을 찾아서 닥닥 긁어 넣었다.턱없이 모자란 설탕이지만 나중에 더 넣어주기로 하고.

옥수수가 불어올라 금새 반 솥이 되었다.

물 한대접이 추가되었고 그게 다 졸아들때까지 또 저었다.

부피는 조금 더 늘어났지만 옥수수가 제대로 퍼지질 않는다.

팥과 콩을 추가하고 물 한대접을 더 붓고 새 설탕 한봉지를 뜯어 한 국자를 퍼 넣었다.

한참을 약한불로 끓였는데 이젠 팥이 안 불는다.

물 한대접 추가.또 한대접 추가.설탕 추가.

이젠 솥의 삼분지이까지 차 올랐고 강냉이도 제법 퍼져서 먹을만했다.

다만 팥이 덜 퍼지긴 했는데 그냥 저냥 먹을만은 했다.

설탕간도 적당하고 소금간은 한번에 맞았다.

물을 조금 더 추가하고 가스불을 최소로 해서 뚜껑을 덮고 뜸을 들였다.

 

아내가 가게 일을 마치고 집에 올라왔다.

한 솥 가득해진 강냉이 범벅에 기함을 한다.

게다가 밥 솥에도 새로 한 밥이 반 솥쯤은 된다.

사실 쌀 세공기면 우리 두식구 사나흘쯤은 거뜬히 먹는다

그런데다 강냉이 범벅이 한 솥이라니,,,

일단 밥솥의 밥은 밥공기로 퍼 담아 냉동실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범벅 한 대접을 퍼 담아 먹었다.

달콤하고 고소한 강냉이 맛 뒤로 쌉싸름한 맛이 퍼진다.

기억해보면 작년에 지은네서 범벅한사발을 가져다 준적있는데

그때 맛도 이런 쌈싸름함이있었던것 같았다.

강냉이 범벅이 원래 그런맛이라고 믿기로 했다.

그리곤 아침저녁으로 한 대접씩 먹었다.

물론 아내도 거들었다.그러라고 밥솥에 밥을 냉동실로 보낸거니까.

삼일째쯤 되었다.

솥에 그득했던 범벅이 절반쯤으로 줄어들었다.

저녁에 또 한그릇을 퍼 먹고 있는데 아내가 묻는다.

"자긴 그거 먹어도 괜찮아?난 그거 먹으니까 뱃속이 부글부글 끓던데,,,"

이미 내 뱃속은 가스로 차오르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아내의 그 말을 들으니

가스가 차오르는 속도가 급 상승하고 있었다.

겨우 마지막 숟가락을 입속에 밀어놓고 그릇을 내 팽개치듯 싱크대에 던지고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 속삭였다.

'이건 명현반응이다.그간 기름기에 찌든 내장들을 강냉이가 씻어내는 과정이다'

 

범벅을 아침저녁으로 먹은지 닷새째다.

솥채로 냉장고에 넣어놓고 대접에 덜어서 전자렌지에 뎁혀먹는데 아주 간편하고 좋다.

뱃속이 부글거리는 증상은 역시 명현반응이 맞다.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이틀동안 출장때문에 나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왔더니 냉장고에 들어있어야할

범벅담긴 솥이 씻긴채 엎어져있다.

아내에게 물었다.

"나 없는새 다 먹었어? 빨리 먹었네?"

아내가 툭 쏴 붙인다.

"버렸어!"

 

오,,,할아버지 죄송합니다.

손주며느리 교육을 잘 못 시켜서 힘들게 농사지은 곡식을 버리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용암처럼 불끈거리고 치 솟아 올라오는 가스의 경험은 더 이상 없어도 되나봅니다.

만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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