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잣말

쉽게 산꼭대기 가기

치악동인 2009. 6. 15. 15:20

내 아내가 꼭대기까지 올라가본산은 서해안 바닷가의 해발 79미터의 석문산 딱 하나다.

우리동네 치악산도 꽤나 유명한 산이긴하지만 내 아내가 오르기엔 절대 무리다.

멀리서 누군가 찾아오면 아내가 먼저 나서서 "치악산에나 가자"고 길을 나서긴하지만

구룡사지나 완만한 산길로 오를수있는 세렴폭포까지가 고작이다.

난 자주 놀려먹었다.

"당신이 올라간 산이 해발 몇미터?"

,,,

"해!발! 79미터"

 

그런 아내에게 산꼭대기에 올라서는 기쁨을 누리게 해줄 기회가 왔다.

태백에서 아내의 오랜친구인 찬우네와 만나기로 했다.

찬우엄마는 아내의 오랜친구이고 찬우아빠는 내 아내에게 "오빠"로 불렸었다.

둘은 우리보다 더 일찍 결혼했고 그때부터 "오빠"는 "니네 신랑"이 됐다.

그들은 나와 아내의 연상연하 연애사를 알고있는 몇 안되는 사람들이다.

찬우아빠엄마와 태백에서의 하룻밤을 예약하고부터 내 머릿속에서는

내 아내를 위한 치밀한 산행 계획이 세워지고 있었다.

태백에는 오르기좋은 산이 둘이나 있다.

완만한 태백산은 아이들도 오르기 좋은 산이지만 그마저도 네시간은 걸릴터이다.

그것도 무리다.

다음은 함백산이다.

산꾼들에겐 말도 안되는 얘기겠지만 함백산은 거저 올라갈수있는 산이다.

누군가 말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산에 오르는건 산에대한 모욕이야"

함백산에 케이블카는 없다.

차로 올라가면 된다.

하지만 그건 케이블카를 타고 산에 오르는것보다 더한 모욕이겠다.

그래서 만항재 고갯길에 차를 세우고 수고스럽지만 조금 걸어올라가는 "조금 덜 모욕적"인 방법을 택했다.

 

웬만한 산꼭대기보다 높은 만항재엔 아침 내내 안개가 덮혀있었다.

아니 그건 안개가 아니라 구름이었다.

우리가 묵었던 리조트를 나설때 산꼭대기에 걸려있던 구름은 낮게 내려덮히며 비를 뿌렸다.

비를 한차례 흩뿌리고난 만항재쉼터에 차를 두고 우린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고갯길을 조금 올라가나 싶으면 다시 내리막길이다.

내 아내가 묻는다.

"우리 산에 올라가는거 아냐? 왜 내려가지?"

사실 그건 나도 의아했다.

내가 미리 인터넷으로 구한 정보에 따르면 함백산 정상 바로 아래까지 도로가 나있고

그 길 이름이 만항재라 했다.

나 대신 찬우아빠가 대답해줬다.

"산길이라고 올라가기만하면 재미없잖아요. 오르락 내리락해야지"

그런데 정말 이상하다.

한굽이 넘어가면 또 도로가 옆에 나타났다.

첨엔 산을 올라가는 다른 길이려니 생각했다.

그러길 몇차례 우린 웃고말았다.

우린 도로 옆으로난 능선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것도 리조트에서 만항재 쉼터를 향해서 지나온 길을 되걷고 있었던 셈이다.

사실 함백산꼭대기를 차로 오르는 길은 만항재쉼터와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

야생화보고인 함백산을 즐기려면 당연히 만항재쉼터에서 우리가 지나온길로 야생화구경을 하며

걸어야맞지만 아주 짧은 거리의 산행을 하려면 함백산 중계소올라가는 입구에서 시작하면 된다.

짧은 산행마저도  정말 싫다면 산에 대한 지독한 모욕이긴 하겠으나 차로 올라가도 되겠다.

찻길에서 시멘트포장길을 따라 몇걸음 올라가니 팻말이 보인다.

함백산 정상1.9Km/1.2Km

그럼 삼십분이면 꼭대기에 올라간다고 큰소리치고 데려왔는데 지금까지 걸은건 뭐?

한시간은 걸은거같은데?

투덜대는 아내에게 함박산 꼭대기에 대한  환상을 재차 각인시켰다.

"꼭대기에 주목나무 군락지가 있대잖아.그거 얼마나 멋잇는데~!"

우리가 다시 산길을 걸은지 삼십여분.

나무들의 키가 작아지기 시작했고 안개가 다시 짙어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지쳤다.

찬우엄마도 지쳤다.

안개가 심해서 우린 정상이 얼마남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키작은 나무들이 정상부근임을 알게 했다.

대충 걸터앉아 물한모금 마시고 쉬면서 그만 가자는 말도 나왔다.

그런데 정말 그곳이 정상 바로 아래였다.

내가 몇걸음을 더 먼저 올라갔을때 내 입에서 어이없는 말이 나왔다.

"어? 여기가 정상인데?"

그랬다.

우리가 쉰곳에서 정상은 불과 십미터 거리였다.

 

 

 

정상에서 잠시 쉬는동안 안개는 비로 변하기 시작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달랑하나뿐인 내 비상용 쟈켓은 아내를 입혔으니 난 반팔상의하나로 비와 맞서야한다.

1572,9 미터의 산꼭대기에서 찬비를 맞으면 아마도 이빨이 덜덜 떨리게 될거다.

부지런히 내리막길을 내려오다보니 다행히 그리 춥지는 않다.

그 와중에 아내에게 물었다.

"오늘 당신이 올라간 산이 해발 몇미터~~?"

,,,,

그새 까먹었나 보다.

"1572.9미터!"

아니다.

내 아내를 위해서 0.1미터 정도는 후하게 반올림 해주자.

"1573미터! 알았지? 담에 누가 어디산 가봤어요?물으면 함백산 1573미터 가봤어요 그러는거야 응?"

 

 

 

 

 

 

 

 

'혼잣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밤 유감  (0) 2009.07.21
비 그치고  (0) 2009.07.15
뱀이 꼬리를 치다.  (0) 2009.06.13
돌 기둥?  (0) 2009.05.18
슈퍼~맨!!  (0) 2009.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