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잣말
불과 일년
치악동인
2021. 1. 18. 13:14
그 여자가 암소식을 전한게 일년이 조금 더 지났다.
3기라던 암은 정밀검사후 4기로 확인됐고 이미 원격전이가 진행된 상태라고 했다.
아마 본인도 자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걸 알았을거야.
잘 하던 식당도 미련없이 접었다.
지나고보면 미적대다가 코로나까지 맞았을테니 잘한일이다.
물론 그여자가 예상하고 한 일은 아니지.
암선고를 받고 보니 아등바등 살았던 삶이 싫었던게지.
사업한다고 늘 돈에 쫒기는 남편 뒤치닥거리도 싫고
치료에만 전념하고 싶었을거야.
살고 싶었을거야.
둘째아들이 너무 일찍 사고를 쳐서 손녀를 얻었는데 그나마 며느리가 어린애를 두고 떠나버려서 손녀를 키워야했거든.
그걸 두고 체념먼저 할순없었겠지.
다행히 신약임상에 참여하면서 치료효과가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지만 그건 일시적인 효과였다.
척추쪽에 전이된 암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거동도 힘들거라고
큰며느리가 전해준게 서너달전.
늘 그여자가 맘에 쓰이는 아내는 맛있는게 있으면 내손에 들려서 심부름을 보내는 바람에 난 간혹 얼굴을 볼수 있었다.
크게 야위지않은 모습이라 안도하곤 했는데 결국은
한달전 다니던 서울의 병원이 아닌 가까운 병원에 입원을 하고 말았다.
암 치료는 중단됐다.
누구는 치과치료때문에 암치료른 중단해서 악화됐다던데
결과는 마찬가지였을거다.
보름전부턴 눈도 보이지않았단다.
우린 병원에 들어갈수가 없었다.
코로나여파로 상주하는 보호자 1인외에는 철저히 출입이
통제되었다.
그나마 병원에서는 퇴원을 요청했다.
요양병원으로 옮겨진 열흘간 가족도 만날수없었다.
잔인한 시간이었다.
보이지않는 눈에는 남겨질 작은 아들이 울고있는 모습이 보이고 먼저 떠난 오빠와 언니가 보였다.
아는 지인들 수소문해서 요양병원에 근무하는 사람을 찾아 상태를 듣고있던 우리는 혈압이 떨어지고 소변량이 줄었다는 얘기를 듣고 임종징후라는걸 알았다.
그녀는 그렇게 혼자 갔다.
마침 남편이 병원을 찾아갔을때가 막 숨을 거두었을때라는게 위로라면 위로다.
불과 일년이면 한사람의 생을 꺽어버리는데 충분한 시간이지.
암환자는 그래도 낫지않은가.
찰나의 순간에도 늘 생과사는 함께니까
아내는 그여자보다 두살위다.
서로 말한번 놓지않고 지낸 사이지만 아내에겐 친구고 형제였다.
그여자의 큰아들을 수양아들 삼아준 인연도 인연이지만
우리가 이곳에 정착하고 주변사람들과 교류할수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우리는 그녀가 만들어준 밥을 먹은게 몇끼인지 헤아릴수가 없다.
코로나 상황이 엄중했지만 장례삼일간 빈소를 지켰다.
조의금도 형제에 준해 준비했다.
그간 소주반병이상을 마셔본적없는 나도 술을 많이 마셨다.
아내는 청심원을 두번이나 먹어야했다.
가족여행한번 못 해본 그 여자는 작은 유골함에 봉해져
겨우 단지하나 들어가는 납골당 유리함속에 안치됐다.
우린 일곱집이 부부모임을 했는데 여행을 가자며 돈을 모았지만 늘 적금이 끝나면 담에 가자고 돈을 나누었다.
두세집은 늘 "지금은 갈수없다"고 했다.
그럼 언제 갈수있을까.
어차피 모든걸 다 할수없으니 우선순위가 있어야지.
새벽에 내리다 그친 눈이 다시 내린다.
한가한 오늘 눈구경하기 좋다.
출근해서 여태 눈 쓸었는데 또 눈 치워야겠다.
십오센티쯤 온다더니 정말 그러려나보다.
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덥는데~
안오는건지 못오는건지~
눈 그치는거봐서 일찍 퇴근해야겠다.
3기라던 암은 정밀검사후 4기로 확인됐고 이미 원격전이가 진행된 상태라고 했다.
아마 본인도 자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걸 알았을거야.
잘 하던 식당도 미련없이 접었다.
지나고보면 미적대다가 코로나까지 맞았을테니 잘한일이다.
물론 그여자가 예상하고 한 일은 아니지.
암선고를 받고 보니 아등바등 살았던 삶이 싫었던게지.
사업한다고 늘 돈에 쫒기는 남편 뒤치닥거리도 싫고
치료에만 전념하고 싶었을거야.
살고 싶었을거야.
둘째아들이 너무 일찍 사고를 쳐서 손녀를 얻었는데 그나마 며느리가 어린애를 두고 떠나버려서 손녀를 키워야했거든.
그걸 두고 체념먼저 할순없었겠지.
다행히 신약임상에 참여하면서 치료효과가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지만 그건 일시적인 효과였다.
척추쪽에 전이된 암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거동도 힘들거라고
큰며느리가 전해준게 서너달전.
늘 그여자가 맘에 쓰이는 아내는 맛있는게 있으면 내손에 들려서 심부름을 보내는 바람에 난 간혹 얼굴을 볼수 있었다.
크게 야위지않은 모습이라 안도하곤 했는데 결국은
한달전 다니던 서울의 병원이 아닌 가까운 병원에 입원을 하고 말았다.
암 치료는 중단됐다.
누구는 치과치료때문에 암치료른 중단해서 악화됐다던데
결과는 마찬가지였을거다.
보름전부턴 눈도 보이지않았단다.
우린 병원에 들어갈수가 없었다.
코로나여파로 상주하는 보호자 1인외에는 철저히 출입이
통제되었다.
그나마 병원에서는 퇴원을 요청했다.
요양병원으로 옮겨진 열흘간 가족도 만날수없었다.
잔인한 시간이었다.
보이지않는 눈에는 남겨질 작은 아들이 울고있는 모습이 보이고 먼저 떠난 오빠와 언니가 보였다.
아는 지인들 수소문해서 요양병원에 근무하는 사람을 찾아 상태를 듣고있던 우리는 혈압이 떨어지고 소변량이 줄었다는 얘기를 듣고 임종징후라는걸 알았다.
그녀는 그렇게 혼자 갔다.
마침 남편이 병원을 찾아갔을때가 막 숨을 거두었을때라는게 위로라면 위로다.
불과 일년이면 한사람의 생을 꺽어버리는데 충분한 시간이지.
암환자는 그래도 낫지않은가.
찰나의 순간에도 늘 생과사는 함께니까
아내는 그여자보다 두살위다.
서로 말한번 놓지않고 지낸 사이지만 아내에겐 친구고 형제였다.
그여자의 큰아들을 수양아들 삼아준 인연도 인연이지만
우리가 이곳에 정착하고 주변사람들과 교류할수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우리는 그녀가 만들어준 밥을 먹은게 몇끼인지 헤아릴수가 없다.
코로나 상황이 엄중했지만 장례삼일간 빈소를 지켰다.
조의금도 형제에 준해 준비했다.
그간 소주반병이상을 마셔본적없는 나도 술을 많이 마셨다.
아내는 청심원을 두번이나 먹어야했다.
가족여행한번 못 해본 그 여자는 작은 유골함에 봉해져
겨우 단지하나 들어가는 납골당 유리함속에 안치됐다.
우린 일곱집이 부부모임을 했는데 여행을 가자며 돈을 모았지만 늘 적금이 끝나면 담에 가자고 돈을 나누었다.
두세집은 늘 "지금은 갈수없다"고 했다.
그럼 언제 갈수있을까.
어차피 모든걸 다 할수없으니 우선순위가 있어야지.
새벽에 내리다 그친 눈이 다시 내린다.
한가한 오늘 눈구경하기 좋다.
출근해서 여태 눈 쓸었는데 또 눈 치워야겠다.
십오센티쯤 온다더니 정말 그러려나보다.
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덥는데~
안오는건지 못오는건지~
눈 그치는거봐서 일찍 퇴근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