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숲
잠이 들거라고 첨부터 기대하지도 않았다.
불을 모조리 꺼 버렸지만 어둠속에서 귀는 더 크게 열린다.
불에 기름을 들여붓는 소리까지 들린다.
뒤척이다 새벽을 맞고는 길을 나섰다.
함양 상림숲.
내가 출장으로 이쪽을 지날일은 없었던 일이고 개인적으로도 이곳까지 오긴 어렵지않을까.
유일하게 남은 2차선의 고속도로는 다행히도 한산했다.
아침 여섯시.
부지런한 사람들이 상림숲을 산책중이다.
이 숲을 만든 최치원은 우리 집안의 뿌리라고 들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더 감개무량하다거나 자랑스럽다거나 하진 않다.
내가 뿌리를 숭배하거나 대대손손을 염두에 둘 사람이면 딸 하나 낳고 예비군 훈련장에서 병원으로 가는 일따윈 없었겠지.
그래도 내 호적등본이 딱 한장에서 끝난다는건 조금 슬픈일이긴 하다.
함양사람들은 좋은 쉼터를 가졌다.
담양의 관방제림도 좋은 쉼터긴 하지만 상림숲에 비하면 차이가 크다.
관방제림은 하천 둑을 따라 나무를 심었고 굵은 나무만 일렬로 남았지만
이곳은 숲이다.
나무와 풀들이 어우러져 있는 습기많은 잡목 숲이다.
숲은 물레방아에서 끝이났다.
산책으로 부족한 사람들은 물레방아와 민가사이의 길을 따라 더 걸어서 오른편의 산길로 들어서는 모양이다.
난 여기까지만 걷기로 했다.
민가에서 키우는 개들이 내게 관심을 보이더니 두마리가 내곁으로 다가 왔다.
코를 들이밀려 탐색하던 녀석들은 아예 내 앞길로 나서더니 안내하듯 먼저 길을 간다.
또 개도둑으로 오해 받을라.
세상에 이놈들 만큼 행복한 개도 없을게다.
답답한 목줄을 하길 했나 쌩쌩 차들이 다니길 하나.
숲 과 동네 사이엔 넓은 연밭이 만들어졌다.
기왕이면 연꽃구경까지 하면 좋겠지만 연꽃도 없고 꽃무릇도 아직은 이르다.
흔한 야생화도 이곳에선 보기 힘들었다.
숲이 우거지기 전인 이른 봄에 피는 꽃이나 늦여름부터 가을에 피는 꽃이나 기대해 봐야 하려나보다.
상림숲 안으로는 작은 개울이 실 핏줄처럼 흐른다.
바깥쪽으로 흐르는 개울은 잘 다듬어졌고 수질정화에 좋다는 노란 창포꽃이 피었다.
상림숲의 면적은 그리 크지않지만 이 만큼이라도 개발에 휩쓸리지 않고 절반 만이라고 살아남은것이 다행이다.
비 그친 숲에는 후드득 후드득 잎사귀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가득하다.
간간히 새소리도 제법 들린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벌레들이 없었던건 아주 다행이다.
천천히 산책하기 참 좋은 숲이다.
중간중간 놓여있는 벤치에서 책 읽기도 좋고.
도란도란 얘기 나누기도 좋겠다.
가을에 다시 오기를 희망한다.
상림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