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멈추고

꽃과 나무에게 말 걸기

치악동인 2011. 3. 10. 15:05

 

마당에서 철 따라 피고 지던 일년초 중 맨 나중까지 붉게 피던 백일홍마저

올겨울 첫추위에 얼어 죽고 나니
마당이 너무도 허전하여, 내년엔 일년초 따위 부질없는 것들은 심지도 말아야지,

하다가 문득 목련나무를 쳐다보았다.

목련나무는 마당에 꽃이 없긴 왜 없냐고 시위라도 하듯이 가장귀마다 솜털 보송보송한,

내년에 필 꽃망울을 촘촘히 매달고 있었다.

내가 너한테 또 졌다고, 소리 내어 말하고 나서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 목련나무하고 나하고는 말이 잘 통하는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사연이 좀 있다.

그 나무는 내가 우리 집을 짓기 전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큰 거목이지만 목련은 성장이 빠르니까 나이를 그렇게 많이 먹은 건 아닌지도 몰랐다.

아무튼 나는 넓지도 않은 마당에 그렇게 큰 나무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집을 야트막하게 지을 작정인데 집보다 높은 나무도 싫었다.

그래서 집 앞에 있는 하천부지나 뒤란 쪽으로 옮겨 심을 궁리도 해 보았는데 정원 일을 하는

식물 전문가하고 의논해보니 옮겨 심는 값이 어머어마했다.

많은 돈을 요구하면서도 정원사는 그 일이 별로 탐탁지 않은 듯 새로 사 심은 것보다

돈이 훨씬 더 많이 드는 짓을 뭣 하러 하느냐고 했다.

별로 비싸거나 귀한 나무도 아닌데 손쉽게 베어버리는 게 상책이라는 말투였다.

정원사의 말도 말이지만 내가 원래 목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꽃이 질 때 산뜻하게 지지 못하고 오래도록 갈색으로 시든 꽃잎을 매달고 있는 게 누추해 보여서
안 좋아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간단하게 그럼 베어달라고 부탁했다.

집을 짓고 있는 도중이었기에 어느 날 없어져버렸는지도 모르게 그 나무는 사라졌다.

그리고 곧 목련이 거기 있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지냈다.

그해 5월에 새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하고 마당 정리하면서 보니 나무를 밑둥에서 베지 않고 일 미터 정도 남겨놓고 있었다.

말뚝으로 쓸 일도 없는데 왜 남겨놓았을까 싶었지만,

그가 눈에 거슬리지 않는 담 모퉁이여서 신경 쓰지 않았다.

여름이 되니 새로 깐 잔디보다 잡초가 더 무성해져서 그걸 뽑느라고
마당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자 자연히 목련나무는 그루터기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게 그냥 서 있는 게 아니라 그루터기 윗부분에서 푸릇푸릇 새싹이 돋아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원치 않는 잡초 취급해 너까지 왜 속을 썩이느냐고 투덜대며

손바닥으로 훑어서 없애버리곤 했다.

그래도 줄기차게 그 그루터기는 죽지 않고 새싹을 토해냈고, 나는 그걸 또 집요하게 훑어낼 때마다
투덜대는 대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게 됐다.

그해 여름내 그 짓을 했다. 그러다가 겨울이 됐으니 그 나무는 확실하게 죽었으려니 안심을 했다.

그러나 웬걸, 그 이듬해 봄 좀 오래 여행을 하고 돌아와 보니 그 나무 그루터기는 사방으로

이파리가 아닌 가장귀를 뻗고 있었다.

가장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자라며 잎도 무성해졌기 때문에 키는 작지만

동그랗게 건강한 나무의 모양을 갖추어갔다.

그해 그 나무는 살아나려고 온 힘을 다하느라 그랬는지 꽃은 피지 않았다.

나는 그 나무의 왕성한 생명력에 질린 나머지 미안하다는 말 대신 내가 너한테 졌다고

무조건 항복을 하고 말았다.

그 후 목련나무는 나의 가장 친한 말동무가 되었다.

가장귀가 너무 촘촘하게 나서 톱으로 솎아주게 될 때에도 아플까봐 미리 양해를 구하는 말을 했고,

전지를 끝낸 후에는 거 봐라 얼마나 시원하냐고 생색을 내기도 했다.
전지를 해주었는데도 이파리들이 어찌나 극성 맞게 빈틈없이 밀생(密生)을 하는지

한여름에 그 나무를 보고 있으면 앙리 루소가 그린 식물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이곤 했다.

무성한 나무는 대개 이파리 하나하나의 모양은 또렷하지 않은 법인데 이 나무는

마치 이파리 하나하나가 나를 향해 시위라도 하듯이 형체가 또렷하고 두터운 질감으로 번들댔다.

그래서 더욱 루소의 그림에서처럼  그 사이에서 괴물이 튀어나올 것처럼 괴기하게 보이기도 했다.

아마 한때 그 나무를 해코지 했다는 나의 자격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잎만 그렇게 무성할 뿐, 이듬해 봄에는 꽃은 피지 않아 나를 안타깝게 했고,

나는 또 나무에게 말을 걸게 됐다.

미안하다고,너를 죽이려 한 것도, 너의 꽃을 싫어한 것도 사과할 테니 내년에는 꽃 좀 피라고

자꾸자꾸 말을 시켰더니 그 이듬해는 시원치는 않지만 꽃이 몇 송이 피었고,

지난봄에는 더 많은 꽃을 피웠다.

아마 오는 봄에는 더 장하게 꽃을 피울 모양이다.

벌써부터 여봐란 듯이 자랑스럽게 준비하고 있는 솜털 보송보송한 수많은 꽃봉오리들을 보니.

그래서 나는 요새도 나의 목련나무에게 말을 건다.

나를 용서해줘서 고맙고, 이 엄동설한에 찬란한 봄을 꿈꾸게 해줘서 고맙다고.

목련이 고마운 까닭은 그 밖에도 또 있다.

목련나무 때문에 나는 꽃이나 흙에게 말을 시키는 버릇이 생겼다.

일년초 씨를 뿌릴 때도 흙을 정성스럽게 토닥거려주면서 말을 건다.

한숨 자면서 땅기운 듬뿍 받고 깨어날 때 다시 만나자고, 싹 트면 반갑다고, 꽃 피면 어머나,

예쁘다고 소리 내어 인사한다.

꽃이 한창 많이 필 때는 이 꽃 저 꽃 어느 꽃도 섭섭지 않게 말을 거느라,

또 손님이 오면 요 예쁜 짓 좀 보라고 자랑시키느라 말 없는 식물 앞에서 나는 수다쟁이가 된다.

일년초들은 목련 나무처럼 오래 삐치지 않고 내 말을 잘 듣는다.

왜 안 피느냐고 독촉하면 곧 피고, 비 맞고 쓰러져 있으면 흙을 돋워 일으켜 세우면서

바로 서 있으라고 야단치면 다시는 넘어지지 않는다.

내 마당의 꽃들이 내 말을 잘 듣는다고 해서 노랗게 피는 꽃한테 빨갛게 피라거나,

분꽃처럼 저녁 한때만 피는 꽃한테 온종일 피어 있으라는 무리한 주문은 안 한다.

무리한 요구를 안 하는 게 아마 꽃이 내 말을 잘 듣도록 길들이는 비법인지도 모르겠다.

아니지, 꽃과 나무들을 내가 길들였다고 생각하는 걸 알면 그것들이 아마 코웃음을
치거나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것들이 나를 길들였다고 정정해야겠다.
                                                _박완서 산문집 "호미" 중에서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