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잣말

봄 맛

치악동인 2010. 5. 17. 18:56

일요일 한낯

땡빛아래 옥상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철수세미로 시멘트 바닥을 벅벅 문질러 댑니다.

시멘트 먼지가 콧구멍으로 매캐하게 파고들어 재채기가 터져나오네요.

옥상 바닥에 우레탄페인트를 작업하려고 열심히 청소하는중이지요.

그거 전문으로 하는 사람한테 맡겨서 하면 신상편하고 좋겠지만

주말 쉬는날 조금 고생하면 백만원쯤은 아낄수 있겠다는 생각에 시작을 하긴 했는데

갈수록 일은 커지고 생각도 못한 난관에 봉착합니다.

그러게 전문가는 괜히 있는게 아닌데 말입니다.

지난번엔 누전차단기가 자꾸 떨어지길래 집안에 등이란 등은 모조리 뜯기도 했었지요.

땀을 비오듯 흘리면 고생 죽어라고 했는데 원인규명에 실패하고 결국 전문가를 불렀더니

참 쓸데없는 짓 많이 했다고 핀잔만 주더군요.

이번 옥상 페인트건도 하다가 중간에 전문가 부르면 그간의 고생은

그야말로 생고생이 되니 우쨋거나 저쨋거나 페인트공사는 내가 마무리를 해야하는데 참 큰일입니다.

보기엔 손바닥만한 옥상이 막상 청소하겠다고 대 들고 보니 진도가 무지 안 나갑니다.

이래저래 살살 꾀가 나는판에 마침 아내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진이 엄마가 두릅이랑 엄나무 순 따 놨다고 가져갈래느냐고 묻는데 어떡할래?"

이럴땐 버선발로 달려가도 모자랄판에 묻긴 뭘 묻습니까?

남들은 두릅 딴다고 온 산을 헤집고 다니는판에 따놓은거 가져다 먹으라는데

거기서 튕기면 안되는거거든요. 암요.

가뜩이나 더워 죽겠는데 핑계김에 얼른 씻고 진이네 두릅가지러 갑니다.

막 집을 나서는데 아내가 한마디 하네요.

"그냥 가지말고 할머니 드실거 사 가지고 올라가~!"

맞습니다.

노인 계신집에 덜렁덜렁 맨손으로 올라갔으면 어쩔뻔했습니까?

이럴땐 마누라 잔소리가 참 다행입니다. 

이래서 남자 옆엔 여자가 있어야 하나 봅니다.

윗동네 진이네는 무릎이 아파 집안에서만 계시는 할머니가 계십니다.

게다가 얼마전엔 백내장 수술까지 받으셔서 꼼짝 못하고 계시니 얼마나 답답하실까요.

봄볕은 내리 쬐이지 정원엔 꽃이 만발인데 그걸 눈으로만 보자니 평생을 농사일을 하신

진이 할머니는 조바심이 나실겝니다.

집안엔 할머니가 한분 더 계십니다.

진이 외할머니가 얼마전 할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내시고 적적함에 딸네집에 다니러 오셨나봅니다.

빈손으로 올라왔으면 정말 민망할뻔했습니다.

안사돈 두분 할머니께서 오손도손 쑥개떡을 부쳐놓으셨다고 맛 좀 보라십니다.

연한 쑥을 씻어 말리고 찹쌀 가루와 함께 빻아서 반죽을 하셨답니다.

쫀득쫀득 찰진맛에 쑥향까지 향긋하니 오후 간식이 이보다 훌륭할순 없겠네요. 

진이 엄마가 따끈따끈한 쑥 개떡 한봉지와 두릅,엄나무순을 한보따리 챙겨줍니다.

따뜻한 쑥개떡을 조각으로 잘라 파마를 말고 있는 아내입에도 한개 넣어주고

소파에 기다리고 있는 손님들에게도 한개씩 맛을 뵈 드려야지요. 

"엄마야~쑥 냄새 좋다~"

쑥개떡을 먹으면 저절로 고향생각이랑 그 고향의 엄마 생각이 나나 봅니다.

 

아예 막걸리 한병 사들고 집으로 올라 갑니다.

향긋한 두릅과 쌉싸름한 엄나무순은 훌륭한 막걸리 안주거든요.

끓는물에 살짝 데쳐서 찬물로 헹궈내고 초고추장 듬뿍 찍어

한입 가득 베어물면 입안에 봄향기가 가득합니다.

누가 내게 "그게 무슨맛이요?"하고 물으면 한마디로 대답해 줄수 있습니다.

"봄 맛이지요"

눈치없는 그가 또 묻습니다.

"봄 맛이 어떤 맛인데요?"

"예끼 여보슈!

봄 맛을 이러컹 저러쿵 말로 표현할수 있으면 그게 어디 봄 맛이요?"

 

두릅 한입에 막걸리 한잔 마시고 나니 옥상청소고 뭐고 낮잠이나 한숨 자야겠습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지요 뭐.

급할거 뭐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