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욱따라
눈이 워낙 많이 쌓였고 날이 추워서 며칠간은 산책할 엄두를 내지 못했지요.
어제 점심을 먹고 보니 창밖으로 보이는 햇살도 따스해보이고
신고나온 신발도 눈밭을 걸을만한 제법 괜찮은 등산화에다 차 한켠에 스패츠까지
미리 넣어둔게 있으니 욕심을 내어 봤습니다.
사실은 사람이 가지않은 산속 눈밭을 어떤 놈들이 뛰어다녔을지가 궁금해서인데요
산책길 초입의 계단을 올라서면 모르긴 몰라도 토끼 발자욱 정도는 있지 싶었어요.
그런데 아이젠없이는 한발짝 올라서기가 무척 힘들어요.
겨우 지팡이 하나 의지해서 끙끙거리고 올라갑니다.
힘겹게 계단을 올라서서 봉본 세기가 나란히 햇볕아래 졸고있는 언덕에 도착했을때
내 산책로를 헤집고 다닌 발자욱이 보입니다.
이 발자욱의 주인공은 노루일겁니다.
두해전 봄에 이곳으로 걸어올라오다가 웬만한 송아지보다 큰 노루와 정면으로 맞닥뜨린적이 있지요.
그 놈은 학살자 한국이를 끌고 나보다 먼저 산에 올라간 직원들에게 놀라 도망치던 중이었어요.
도망친다고 친 방향이 하필이면 내가 막 계단을 올라섰을때이니 나도 놀라고 그놈도 놀랐지요.
그녀석 긴다리가 나를 보고 급 멈춰서는데 휘청하면서 내 머릿속으론 자동차 급브레이크 밟는늣한 소리까지
들렸더랬습니다.
허둥지둥 뒤돌아 뛰어가는 녀석의 엉덩이엔 분명 하얀털이 있었으니 고라니보다는 노루가 아니었을까
추측이 됩니다.
이왕 눈밭으로 들어선거 노루 발자욱을 따라 갑니다.
눈밭을 금방 파헤친듯한 표식에 발이 멈췄습니다.
쬐그만 굴같은것이 보이길래 다람쥐굴이려니 하고 지나쳤지요.
길 중간중간 그런 비슷한 흔적들이 많이 보이네요.
그러고보니 굴이라기보단 노루가 먹을걸찾아서 뒤진흔적인가봅니다.
혹시 가을에 저장해둔 보물창고는 아닐까도 생각해봤지만 글쎄요,,,
노루발자욱은 내가 걷던 산책로를 줄곧 걸어갑니다.
그러고보니 이길은 원래 노루가 걷던 길이었나봅니다.
내가 만든 길을 노루가 걸었으니 통행료를 징수해야겠다고 잠시 생각했었는데 통행료는 내가 내야할판이네요.
그간 조용한 숲속에서 불쑥 나타나서 내 심장을 덜컥거리게 만들었으니 그걸로 통행료 대신입니다.
큰노루와 맞닥뜨려서 놀랐지요 새끼노루 두마리가 앞뒤에서 겅중거리며 뛰어다녀서 놀랐적은 또 여러번이거든요.
나도 한번은 그들에게 도움이 된적도 있었어요.
한해 가을 누군가가 철사줄로 덫을 만들어놨더군요.
먹을게 없는 세상에 사는것도 아닌데 이 순한 짐승들을 왜 잡아먹겠다고 그런 짓을 하는지,,,
그래서 기어이 덫이 있던곳까지는 가보고 왔습니다.
다행히 사람발자국도 덫도 없는곳에서 노루 발자욱만 내 산책로를 앞질러 가다가 종종 좌우로 뛰어다녔더군요.
내려오는길은 올라가는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발이 줄줄줄 미끄러져서 반은 걷고 반은 미끄럼을 탑니다.
그리 험한길은 아니라서 위험할건 없지만 혹시 몰라서 점심시간 끝날때까지 내가 안보이면
조난당한줄 알고 산으로 찾으러오라고 농담삼아 다른 직원한테 일러뒀는데
정말 날 찾아 헤매기 전에 얼른 내려가야지요.
양지바른 산소옆으로 산길을 걸어간 노루와 내 발자욱이 섞였습니다.
그리고보면 우리는 세상을 결코 혼자 걸어가는건 아닌가봅니다.
누군가 걸어간길을 걷거나
또는 누군가와 함께 가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