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을 멈추고

집나온 남자

치악동인 2011. 1. 17. 19:36

일요일 낯

11시경 집을 나섰으니 일요일 출발중 꽤 빨리 길을 나선 셈이다.

어디로 갈까,,,

우선은 날이 너무 추워서 문제였다.

난 서해의 노을 구경이나 하고 싶어서 안면도쪽으로 가고 싶었지만

아내는 너무 멀다고 극구 말렸다.

동해로 가나 서해로 가나 큰 차이도 안나는구만 뭐가 멀다고.

꼴두새벽에 길을 나선다면 동해의 일출을 본다지만 해가 똥구녁에 치받힌 다음에

길을 나선다면 차라리 서해의 낙조를 보는게 더 나으리란 나의 계산인데,,,

 

일단 방향은 동쪽으로 잡았다.

가만 생각하니 날도 추운데 동굴여행은 어떨까 싶어 삼척의 동굴지대로 가야겠다 싶다.

지난번에 천동동굴 들어가보니 땀이 후줄근할정도로 따뜻하고 좋았으니

추위걱정없이 산책삼아 걷기는 동굴이 나름 좋을듯했다.

목적지를 바꾼건 영월쪽에 접어 들어서였다.

문득 이 즈음의 정선 레일바이크는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고,

곧바로 예약없이 가능한가 전화로 문의를 해봤다.

요즘 비수기라서 예약안해도 여유가 있단다.

영월에서 전혀 알지 못하는 길로 네비가 안내를 시작했다.

이정표는 평창을 가르킨다.

내 생각으론 태백쪽으로 새로난 큰길로 가다가 증산에서 민둥산쪽으로 들어가면 되려니했더니

내 생각보다 왼쪽으로 휘어져 굽이굽이 고갯길을 자꾸 넘으란다.

한시간쯤 인가도 뜸하고 차량 통행도 뜸한 길을 달렸다.

아내가 배고프단다.

아침을 안 먹었으니 배 고프겠지.

하필이면 물도 안 챙겨나왔는데 어째 구멍가게도 하나 안 뵈는 산길만 줄곧 이어진다.

나타나는 이정표.

대화,마차,미탄,,,

그러니까 여기가 울 아버지가 말하던 그 산골마을이구나 싶다. 

울 아버진 평생 운전을 하신 분이니 우리나라 방방곡곡 안가보신 곳이 없는데

제천주변에서 그중 두메산골을 꼽으라면 지금 지나는 이곳을 꼽으셨다.

아버지에게 들은 지명을 아버지 가신지 십여년이 지난 지금 이정표로 본다.

왈칵 아버지 생각이 밀려든다.

안 돌아가셨으면 지금 우리와 함께 여행을 하고 계실텐데.

그러고 싶었다.

아버지 모시고 방방곡곡 여행도 하고 싶었고,

저녁이면 아버지 좋아하시는 약주한잔 받아서 낯에 있었던 바깥일들을

아버지께 미주알 고주알 일러바치고 싶었다.

나 어릴적 우리집엔 할아버지 친구분들이 자주 오셔서 시간을 보내다 가셨는데

그때 할아버지 친구분들의 공통된 의견은

저녁에 술 한잔 같이 마셔주는 아들이 가장 효자라고 하셨다.

나도 효자 흉내한번 내 보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기다려주시질 않았다.

일자릴 찾아 사람들이 탄광으로 몰리던 시절에 미탄의 개울가에는 올망졸망한

판잣집들이 줄지어 처마를 맞대고 세워졌나보다.

이젠 인적조차 드문 을씨년스런 마을을 지나 고갯길을 또 하나 넘었다.

근사한 식당은 아니라도 시골스러운집에서 맛깔난 산채비빔밥 한그릇 먹고싶다는 소망은

산길을 굽이굽이 넘어갈때 아내의 탄식으로 허공에 흩어졌다.

"없어 없어.이런데 뭔 식당이 있어? 그냥 동해바다나 보러 가자니까,,,"

휴,,,

어이! 이 마누라야!

나도 이길은 처음이고 내가 어디 어디가면 맛집이 있고 어디어디가면 짠~하고 멋있는데를

쫙 보여주는 드라마속의 이벤트잘하는 그런 남자는 아니거든.

그런놈은 거의 다 순 바람둥이라고.

눈뜨면 회사나가고 회사 마치면 집에 기어들어오는 내가 어떻게 그런걸 다 알겠냐.

드라마에서 나오는거야 작가며 피디들이 온갖데를 다 헤집고 다니면서 발품 팔아 모은 정보들인데

퇴근하고 딱 십오분만 지나도 지금 어디냐고 모가지 잡아 끌면서 별걸 다 바란다. 참나,,,

 

그때 기적처럼 길가에 제법 근사해보이는 식당이 나타났다.

이미 정선의 언저리에 들어가 있었으니 정 안되면 정선 시장으로 돌입한 작정이었는데

재를 넘어 내려가는 길 한켠에 토속장류를 만들어 파는 식당겸 농수산물 판매점이 있었다.

급하게 차를 세우고 안에 들어가 우선 밥부터 주문했다.

밥이 나오는동안 식품매장에서 쥐눈이콩 된장이며 밥에 넣어먹을 옥수수,유기농 과자를 샀다.

원래 관광지에 나와서 웬만하면 물건구입을 잘 하지 않지만

웬지 이곳은 꽤 믿을만한곳이라는 느낌이 들어 선뜻 먹을것들을 한봉지 담았다.

된장찌개도 맛있었다.

평상시보다 더 오버하며 "맛있다"를 연발했다.

옆에서 누가 맛있다며 먹으면 덩달아 맛있는 법이다.

배고파서 짜증난 마누라를 달래려면 아주 맛있는걸 먹기위한 기다림이었다는 인식을 심어줘야했다.

 

우리가 맛있게 밥을 먹고 있을때 우리보다 한걸음 먼저 들어와 혼자 밥을 먹은 남자가

떠나기가 아쉬웠는지 홀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주머니. 내가 집에서 쫒겨나서 한달째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소"

주인인지 직원인지 안쪽에서 어느 아주머니의 말대꾸가 들렸다.

"아저씨.쫒겨난 사람은 쫒겨났다고 얘기 안하지요"

그건 맞는 말이다.

그 남자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내가 말이지요 아파트 육십평짜리를 마누라 앞으로 해줬어요.

싯가로 따지면 삼십억쯤 돼요.

근데 그 명의를 마누라 앞으로 해주고 나니까 이 마누라가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어요.

눈만 뜨면 돈 더 벌어 오래요.

내가 꽤 많이 벌어다 줬거든요.

생활비라고 주면 기껏 아파트 관리비만 내고 나머지는 죄다 사치에 쓰는 거예요.

옷사입고 가방사고 뭐하고 뭐하고,,,

그러면서 맨날 돈 더 벌어오래요.

이건 눈만 마주치면 돈 더 내놓으래니 스트레스 받아서 살수가 없어요.

마누라 차도 하나 뽑아줬어요.비엠따블유로.내차는 벤쓰오백이구요.

재산 다 합치면 백억쯤 돼요.

이만하면 적은 재산도 아니고 먹고 살만한데 돈 얘기만 해 대니 이러다 내가 죽겠구나 싶어서

집 나와 돌아다닌지 한달째인데요,

너무 너무 좋습디다.

휘돌아다니다 경치좋은데서 하루이틀 묵어가기도 하고요

인심좋은 시골사람들은 자기들 먹는음식 같이 먹자고 불러세우기도 해요.

회사엔 특별한 일 있을때 직원들이 연락하면 잠깐 들려서 일보면 되니까 이렇게 사는게

훨씬 더 좋은거 같아요."

한참을 혼자 푸념겸 자랑겸 늘어놓던 그 양반은 벤쓰오백을 타고는 씩씩하게 사라졌다.

 

그 남자가 사라진후 마누라가 슬그머니 물었다.

"나도 그래?"

"아~~니!"

 

꼬리를 내리고 살려면 확실하게 내리고 살아야한다.

늘그막에 집 나와 돌아다니는 신세 안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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